근로, 노동 잡생각


이 기사(http://hankookilbo.com/v/6c2aea2edfd048d5b1ee03b57a022fdf)에 대한 단상이다. 

법안 내용에는 반대할 것이 없다. 다만 법안 제안자가 암시하는 것처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생각하는 것처럼, 종래 이데올로기적 이유로 "노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 "근로"라는 말이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전에도 어디선가 간략하게 언급한 적이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럴 수 없음이 드러난다.

우선 일제시대가 배경이 되므로, 먼저 "근로"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일본어부터 살펴본다. 일본어에서 "근로"는 한편으로 "몸과 마음을 써 열심히 일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정한 시간 내에 일정한 노무함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후자는 우리가 노동법에서 말하는 종속노동과 큰 차이가 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일본 법학에서 근로자나 노동자, 근로권이나 노동권은 같은 의미로 이해되고, 다만 관용적으로 노동자와 노동권을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제는 이 표현이 일반적이다. 물론 "근로"가 "근로정신대"에 쓰였을 때에는 전자의 의미였을 수 있겠다. 하지만 "근로"는 적어도 사회과학이나 법률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보다 더 자주 쓰였던 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 말은 "근"이 가지는 긍정적인 함축을 선취하는 장점이 있다. 왜 여운형 선생이 해방공간에 조직한 정당이 "근로인민당"이겠는가? 왜 북로당이 1946년 간행한 기관지 이름이 <근로자>이겠는가? "열심히 일하는 근로대중"과 그렇지 아니한 사람(특히 대자본가)의 대비를 전제로 긍정적인 어감을 가지고 호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 등 우리나라 노동기본권 및 노동관계법의 다수는 월북하지 않은 비공산주의 사회주의자가 다수 포진했던 초대국회 및 제2대국회에서 제정되었다. 게다가 노동기본권 및 노동관계법의 제정에서 사회주의적 배경의 의원들은 맹렬한 활약을 하였고, 이는 이흥재 선생님의 역저 <노동법 제정과 전진한의 역할>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입법과정을 보면 어느 누가 "근로권" "근로자"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꼈다는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언어감각으로 "근로"는 긍정적 어감을 가진 종속노동의 의미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사정을 이유로 "근로"라는 말을 유지하자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언어 관행의 변화에 따라 "근로"가 가지는 그러한 의미는 거의 없어졌고, 이제 현대 한국에서 근로는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만 이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동이 보호되지 않았던 독재정권 하에서 "근로기준법"을 불 사를 때, 그것이 가지는 긍정적인 의미도 완전히 퇴색해 버렸다. 법률의 언어를 현재의 언중의 사용에 맞추는 것이 옳은 일이다. 다만 나는 적어도 여전히 "근로"라는 말을 사용했던 우리 노동관계법의 입법자들에 대한 존중을 마음 속에 품고 살고 싶다. 이들은 엄혹한 환경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존경할 만한 입법자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덧글

  • 지나가는 입법종사자 2018/08/22 08:32 # 삭제 답글

    개헌특위를 보면서 이해가 안되었던 부분이 해소되었습니다. 특히 제헌회의록은 한글화되어 있어서 저같은 까막눈도 보기가 쉬웠습니다. 근로대중, 노동자라는 말이 병렬적으로 쓰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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